"당신 탓이 아냐" 아내의 말에 남편은 10년만에 울음을 터뜨렸다

2024.04.15 04:30

[산 자들의 10년]<2> 사라진 소년 삼일마트 주인 부부, 은인숙·강병길이 버틴 10년 야무진 성격의 삼일마트 주인 은인숙은 셈이 틀리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아무리 세도 두 보루가 모자랐다. 찜찜한 마음을 애써 달래며 아들 강승묵에게 전화를 걸었다. 밤 1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뉴스에 흉흉한 사건이 많이 보도되던 때라 불안감이 엄습했다. "엄마, 저 지금 집에 들어가고 있어요." 아들의 밝은 목소리에 마음이 놓였다. 두 달 뒤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그 소식 들었어? 마트집 아들 실종됐대." 해 질 녘까지 꼬마들이 뛰어놀고, 이웃끼리 서로 자녀를 봐주곤 하는 안전한 안산 월피동에서 아이가 없어지다니. 더구나 초등학교 후문의 삼일마트는 이 동네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집 아이가 사라졌다는 소식은 엄마들을 중심으로 삽시간에 퍼졌다. 마트는 종일 셔터가 내려가 있었다. 셔터에 색색의 메모가 붙기 시작했다. 승묵이는 '마트집 아들'로 불렸다. 말을 해본 적은 없어도 오가며 본 까닭에 얼굴을 기억하는 주민이 많았다. "부디 무사히 돌아오렴" "오빠, 꼭 돌아와. 슈퍼에서 기다릴게" "살아 돌아와서 웃는 얼굴 보여줘. 동네 아줌마가" 간절한 마음을 옮겨 적은 편지와 쪽지들은 셔터 주변의 천막과 가로수에까지 빼곡히 붙었다. 일주일 후. 승묵이를 찾았다는 소식이 돌았다. 사람들은 한달음에 삼일마트 앞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마트집 부부와 아들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주민들에게 보내는 답장이 셔터에 붙어 있었다. "많은 분들이 걱정해 주셨는데 승묵군은 더 이상 춥지도, 무섭지도 않은 곳으로 여행을 갔습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지만 기억하겠습니다. 응원해 주시고 걱정해 주신 주민 시민 여러분, 감사합니다." 매일 아침 7시부터 다음 날 새벽 1시까지 동네 골목을 환히 비췄던 삼일마트는 그렇게 문을 닫았다. "아빠, 엄마 어떻게 만났어?" 딸 민정의 말에 강병길은 직접 기른 야콘을 마저 깎아 접시에 내려놓고 일어났다. 병길의 손은 유독 새카맣고 거칠었다. 하얗던 손이 귀농 6년 만에 변했다. "뿌리가 깊어서 캐기 힘들었는데… 그래도 민정아, 먹을 만하면 하나 더 심을까? 변비엔 이게 최고래." 애써 딴소리를 했지만, 병길은 아내와 처음 만났던 그날을 떠올렸다. 집안 어른들 성화에 못 이겨 선을 보다가 운명처럼 인숙을 만났다. 민망해 어디다 한번 해본 적 없는 말이지만, 인숙의 웃는 얼굴에 첫눈에 반했다. 2년간의 연애는 순탄치 않았다. 인숙의 집안은 두 사람의 궁합이 나쁘다며 반대했다. 이후 인숙이 부모 말을 따라 회사를 그만두고 지방으로 내려가면서 소식이 끊겼다. 이별 후 병길이 식사를 못 해 병원에 잠시 입원했던 어느 날, 인숙이 병원으로 찾아왔다. "당신 살려주려고 왔어요." 병길은 그날 다짐했다. 누구보다 든든한 가장이 되겠다고. 그때 아빠가 너네 엄마를 잡지 않았더라면… 딸에게 이런 이야기를 다 털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1995년 9월. 부부는 마음에 쏙 드는 신혼집을 찾아냈다. 낮은 연립주택 사이 골목마다 햇살이 잘 드는 동네였다. 작은 집이었지만 아이들을 키우기엔 적당해 보였다. 인숙은 두 해 뒤 3월 맏이인 승묵이를 낳았다. 스물일곱 살 인숙은 서툰 엄마였지만 자신이 낳은 작은 생명이 무척 애틋했다. 아이가 첫 배밀이를 하던 날 찍은 사진 밑에는 "목욕하는 줄도 모르고 잠자는 우리 아기, 어서어서 많이 먹고 건강해져라. 사랑한다"고 적었다. 그 어떤 말보다도 진심이었다. 전업주부였던 인숙이 마트를 차리기로 결심한 것도 아이들 때문이었다. 학비를 조금이나마 보태고 싶었다. 장사를 시작한 뒤 늘 잠은 모자랐지만 행복했다. 남편이 출장 간 날이면 가게를 조금 일찍 닫고는 마중 나온 남매 손을 양옆에 잡고 집까지 걸어가던 그 길. 마음이 몹시 꽉 찬 기분이었다. 그해 직전 여름, 한 달 8만 원이던 용돈을 아껴 두 아이가 처음으로 차려준 엄마 생일상엔 '돼지 미역국'이 올랐다. 인근 정육점 사장님에게 전해 들은 말로는 소고기를 살 돈이 모자라 한참을 고민하다 돼지고기를 사 갔다고 했다. 근데 그게 미역국에 넣을 고기였냐고. 인숙은 두 아이를 꼭 껴안고 말했다. "엄마는 지금 너무 행복해." 웃음 많고 쾌활했던 인숙의 머리카락은 그날 이후 하얗게 변해버렸다. 병길은 실종 일주일 만에 발견된 승묵이를 아내에게 보여주기가 주저됐다. 배가 침몰해 물속에 있었던 시간이 길어 얼굴이 많이 상한 탓이다. 병원 직원은 하루빨리 장례일을 잡자고 재촉했다. 병길은 인숙에게 "승묵이를 마지막으로 보겠느냐"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러나 아내와 함께 아들의 얼굴을 본 병길은 크게 후회했다. 아이의 얼굴은 하루 새 더 까맣게 변해있었다. 인숙은 그 자리에서 실신했고, 그 이후가 기억나지 않는다. 덕분인지 가끔 꿈에 나오는 승묵이는 여전히 희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인숙을 입원시킨 후 병길이 늦은 밤 들른 삼일마트 주변은 형형색색의 메모로 뒤덮여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승묵이를 위해 기도해 줬다는 사실에 놀랐다. 하지만 이내 '이들 모두에게 아들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덜컥 겁이 났다. "승묵이가…" 혼잣말로 연습해보려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병길은 한참을 꺽꺽 울다 연습장을 찢어 꾹꾹 눌러쓴 글을 셔터에 붙이고 돌아섰다. "승묵이는 더 이상 춥지도 외롭지도 않은 곳으로 떠났습니다. 감사합니다." 승묵이를 보내던 날, 동생에게 부탁해서 그 메모들을 하나하나 포개어 함께 태웠다. '승묵아, 이렇게 많은 사람이 너를 기다렸단다.' 부부도 처음에는 다른 부모들과 함께 청와대로, 광화문광장으로 다녔다. 삭발한 채 끼니를 때우려고 늦게 식당에 들어섰던 날, 얼굴을 알고 지냈던 동네 엄마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아이 먼저 보내놓고 밥이 넘어가?" "보상금 더 받으려고 저러지?" 그래도 4년을 안산에서 버텼다. 마트 문 닫고 함께 걷던 길, 승묵이가 다녔던 초등학교와 좋아하던 피자집을 보고 있으면 아이가 그 안에서 금방이라도 걸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곳을 떠나면 승묵이와의 기억이 흐릿해질까 봐 겁이 났다. 병길도 생애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가끔 떠올렸다. 승묵이가 중학교 1학년 무렵, 퇴근길 아빠를 마중 나온 가족과 함께 빌라 단지 옆 가로수 벚꽃을 봤던 늦은 밤이었다. 바쁜 부모 탓에 벚꽃놀이 한번 제대로 못 해본 아이들은 아빠가 벚나무 사이로 목말을 태워주자 너무 신나했다. 몇 해가 지나서도 그날의 기억을 재잘거리곤 했다. 하지만 승묵이와 함께 뛰놀던 그 벚꽃길은 지방선거를 앞둔 2018년 현수막으로 뒤덮였다. '납골당 전면 백지화' '화랑유원지에 세월호 납골당이 웬 말이냐' '세월호 전용 납골당 결사 반대' 해골 그림까지 그려진 현수막은 아빠의 마음을 후벼 팠다. 인숙은 그해 겨울 문재인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청하며 영하 15도의 날씨에 노숙농성을 했다. 하지만 열릴 줄 모르는 청와대 정문을 보며 '이젠 정말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심한 스트레스 탓인지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의사는 아이와의 추억이 남아 있는 공간에 더 머물면 인숙이 위험해질 수 있다고 했다. 병길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이를 잃었는데, 아내마저 잃을까 봐 무섭다는 말은 현실이 될까 봐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다. 새로 이사한 동네는 하루 두 번 텅 빈 시내버스가 오가는 외진 곳이었다. 가족은 오래된 흙집에 보금자리를 꾸렸다. 일부러 아는 사람이 전혀 없는 곳을 고르고 골랐다. 세 가족이 먹고살려면 돈을 벌어야 했다. 병길은 건축 일처럼 고되게 몸 쓰는 작업만 골라서 했다. 그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아들 승묵이를 잃은 뒤 어떤 일에도 집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직장 생활을 15년이나 했고 사업체도 운영했지만, 그 사건 이후로는 물건도 곧잘 잃어버리고 해야 할 일도 자주 까먹었다. 그나마 몸을 쓰면 잡념이 줄었다. 작은 동네에 젊은 가족이 이사 오니 주민들이 관심을 보였다. 조금 가까워졌다 싶으면 여지없이 '아이는 딸 하나냐'고 물었다. 질문에 나쁜 뜻이 담겨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아이를 잃었다'고 답하는 건 '물건을 잃어버렸다'고 하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원래 둘이었는데 하나를 먼저 보냈어요'라는 말을 쉽게 꺼낼 수 없었다. 그때부터 사람들을 피하기 시작했다. 세월호 유족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어떤 비난이 쏟아질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차에는 흔한 노란색 리본 스티커도 붙이지 않았다. 승묵이의 책상은 어쩌다 마을 이장님이 들르더라도 볼 수 없는 옷방 구석에 뒀다. 인숙의 날 선 마음은 가끔 가까운 사람을 향했다. 바로 남편이다. 퇴직금 4,500만 원을 주식으로 잃었을 때도 "괜찮다. 같이 벌면 된다"고 했던 아내였다. 하지만 병길이 승묵이와의 마지막 통화에서 "구조하러 온 해경 지시를 잘 따라서 조심히 나오라"고 했다는 말을 듣고는 분노가 치밀었다. 사실 남편은 죽을 힘을 다하고 있었다. 승묵이가 탔던 배를 바닷속에서 인양할 때 근처 무인도에서 산나물을 뜯어 먹고, 텐트에서 쪽잠을 자며 망원경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남편이 자신과 딸을 돌보려 뛰어다닌다는 걸 알았지만, 인숙은 병길을 원망했다. 시간이 갈수록 유족들이 모인 밴드방도 조용해졌다. '뭔가 해결될 것'이라는 희망이 체념으로 변해갈 무렵 부모들의 부고만 이따금 올라왔다. 50대에 불과한 사람들이었다. 시골에선 창밖 풍경으로 계절을 느낄 수 있다. 겨우내 얼고 녹았던 쪽파가 선명한 녹색을 띠어가면 승묵이 생일인 3월이 돌아온다. 승묵이를 바다에서 되찾은 4월 23일도 어김없이 찾아온다. 해마다 4월은 승묵이네 가족을 다시 그날로 데려간다. 마치 바로 그날인 듯, 뉴스 화면에는 세월호가 등장한다. 조용했던 유족 밴드가 세월호 관련 행사를 알리느라 연중 가장 분주해지는 시기다. 인숙은 생각했다. 자신처럼 부모 같지 않은 엄마는 세상에 아무도 없을 거라고. 다른 엄마들은 끼니마다 아이 방에 식사를 차려주거나, 계절이 바뀌면 새 옷도 걸어준다던데 자신은 아이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어른들 말씀처럼 '후생'이 있다면, 신이 있다면 애초에 그런 일은 벌어지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는 승묵이를 낳고 나선 더욱 정성스레 집안 제사며 차례를 도맡아 지냈다. '열 살까지 팥떡을 생일상에 올려야 아이가 건강히 자란다'는 이야기를 듣고선 '팥단지'도 꼬박꼬박 아이 생일상에 올렸다. 승묵이 얼굴이 손에 잡힐 듯 아른거리던 순간, 영석 엄마에게 오랜만에 전화가 걸려왔다. 아마 행사에 나오라는 용건이겠지. 설득해도 나가지 않을 걸 알면서 전화를 했네. 하지만 영석 엄마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그때 그 담배, 승묵이 거였다며?" 영석이가 학교에서 담배를 압수당해 불려 간 적이 있는데, 나중에 실토하기로 승묵이가 준 것이라고 했단다. "내가 승묵 엄마 대신 혼났잖아." 인숙은 담배 두 보루가 비었던 날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맞아. 승묵이가 그날따라 슈퍼로 엄마를 데리러 오며 큰 가방을 하나 가져왔었지.' 슬며시 웃음이 났다. 아이를 잃은 두 엄마가 소리 내어 웃었다. 애들이 담배 피워본 게 위안이 된다니. 다들 미쳤다고 하겠네. 승묵이가 막 떠났을 때 한 친구가 "승묵이가 장난삼아 담배를 한 대 피워봤다"는 이야기를 했던 기억도 어렴풋이 떠올랐다. 오랜만에 잊고 있었던 삼일마트를 떠올렸다. 그날 이후로 한 번도 가지 않았던 동네. 가장 행복했지만 가장 슬펐던 동네. 승묵이의 이름은 이을 승(承)에 잠잠할 묵(默)이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끈기 있게 이뤄나가라'는 뜻으로 지었지만, 누군가는 부모가 아이의 이름에 묵묵하다는 뜻을 넣어서 잘못됐다고도 했다. 인숙은 그게 아니라고 확인하고 싶었다. "승묵아, 엄마 이제 한번 우물 밖으로 나가볼게." 인숙은 2월 25일부터 3월 16일까지 진행된 세월호 참사 10주기 전국 시민행진 전 구간 304㎞를 완주했다. 승묵이가 수학여행을 갔어야 할 제주부터 시신이 돼 돌아온 팽목항, 23개 도시와 지난 6년간 가지 못했던 안산을 거쳐 서울로 향하는 일정이었다. 길을 걸으며 하루도 울지 않은 날이 없었지만, 아직도 기억해주는 시민들이 있다는 게 위안이 됐다. 그 길을 걷는 내내 집 안에 홀로 있을 병길이 떠올랐다. 작업복이 흙투성이가 돼 들어와도 하나도 힘들지 않은 양 씩 웃어 보이는 남편이지만, 인숙은 그가 4월이 다가올 때마다 어린아이처럼 입술을 떨면서 엉엉 울다 깨고 돌아눕는 것을 안다. 우리 승묵이 당신 탓이 아니라고, 원망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해 줬어야 했는데. 우리 남편 너무 외롭고 힘들었을 텐데. 긴 외출 끝에 병길이 기차역에 마중 나와 있었다. 인숙은 처음으로 그 말을 꺼냈다. "내가 승묵이와 마지막으로 통화했더라도 당신처럼 이야기했을 거야."병길은 10년 만에 처음으로 인숙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2018년, 그해 월피동을 떠난 건 인숙 부부만이 아니었다. 장훈도 보금자리를 일산으로 옮겼다. 33년 동안 살며 4남매를 키웠던 동네를 벗어난다는 건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식들을 지키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맏이인 준형이가 여객선 참사로 세상을 떠난 뒤 동생들은 쏟아지는 비방과 억측에 상처 입으며 겨우 버티고 있었다. 병길이 그랬듯 장훈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려면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일산으로 이사한 뒤 그는 주류 유통업체에서 일한다. 1.3톤 트럭을 몰고 고양과 은평 일대 식당에 소주와 맥주를 배달한다. 아픈 두 무릎에 보호대를 차고 매일 박스 100여 개를 나른 지 꼬박 1년 반이 됐다. 사실 장훈에게는 명함이 하나 더 있다. 거기엔 '연구소장'이라는 직함이 쓰여 있다. 집 근처에 8평 남짓한 연구실도 마련했다. 보기만 해도 두통이 생길 것 같은 보고서와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는 공간이다. 연구소장은 장훈에게 여전히 어색한 자리다. 하지만 자신이 선택한 길이기도 하다. 6년 전 스스로 과학자가 돼야겠다고 마음먹은 그날을 장훈은 선명하게 기억한다. <3회에서 계속 / 4월 16일 한국일보 지면과 홈페이지에서 공개됩니다.>

[단독] 서울시교육청, '현주엽 논란' 휘문고 오늘부터 고강도 감사

현주엽 휘문고 감독의 농구부 파행운영 의혹과 관련해 서울시교육청이 15일부터 일주일간 휘문고에 대한 고강도 감사에 착수한다. 기존 예정된 종합감사를 겸한 이번 감사에서 교육당국은 현 감독을 둘러싼 의혹은 물론, 휘문고와 재단(휘문의숙)을 향해 제기된 각종 비리 의혹을 전반적으로 들여다볼 예정이다. 재단 측이 과거 학교시설인 체육관을 교회 측에 빌려주는 대가로 기부금 수십억 원을 받은 사실까지 뒤늦게 확인돼 논란은 더 커질 전망이다. 14일 교육계에 따르면, 서울시교육청은 15일부터 일주일간 휘문고 종합감사를 실시한다. 교육당국은 앞서 2월 현 감독이 방송활동 등을 이유로 감독 업무를 소홀히 했다는 취지의 민원을 접수해 특별장학을 진행했고, 조사 결과 사안이 중대하다고 판단해 정식 감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시교육청은 이번 감사에서 학교 관계자와 학부모 등을 상대로 한 1대 1 질의·응답도 계획하는 등 강도 높은 현장조사에 나설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특별장학을 통해 현 감독이 학교 측과 계약한 주당 40시간의 근무를 채우지 못했으며, 이를 보충하는 방과 후 훈련 기록도 확인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현 감독의 보수 지급 과정에서 불거진 잡음도 중점 감사 대상이다. 휘문고 측은 지난해 11월 3개월 임기를 남겨둔 A감독을 대신해 현 감독을 전임코치로 선임했다. 2명의 감독이 공존한 탓에 인건비는 2배로 늘었고, 학부모 부담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시교육청은 학교 측에 지원하는 일부 학교운동부지도자 인건비가 규정과 달리 현 감독이 아닌 A감독에게 지급된 건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서울시 학교운동부 운영매뉴얼에 따르면, 학교장은 학교운동부지도자의 인건비와 관련해 학부모 부담 경비가 가중되지 않도록 관리·감독을 철저히 할 의무가 있다. 현 감독이 받는 연봉은 약 8,000만 원 내외인 것으로 알려졌다. 휘문고와 재단이 회계부정 의혹 등으로 교육당국의 감사를 받는 건 처음이 아니다. 김정배 재단 이사장은 지난해 민원감사에서도 휘문고에 대한 학사개입, '셀프 성과급' 지급, 회계 부적정 처리 등 사유로 6회 경고 처분을 받았다. 당시 시교육청은 "동일한 행태가 반복되면 임원취임승인취소 처분을 검토하겠다"고 김 이사장에게 통보했다. 재단이 과거 B교회에 주말 예배장소 목적으로 체육관을 빌려주면서 30억 원의 '조건부 기부 약정'을 체결한 사실도 드러났다. 본보가 입수한 2019년 9월 30일 B교회와 휘문 재단의 기부약정서에 따르면, 재단 측은 B교회로부터 2017년 12억 원, 2019년 13억 원, 2022년 5억 원 등 세 차례에 걸쳐 총 30억 원의 기부금을 받기로 했다. 그 대가로 2017년 1월 23일 휘문고와 B교회가 체결한 임대차계약을 "승인하고 성실히 준수될 수 있도록 보장한다"고 재확인했다. 문제는 임대차계약 준수를 조건으로 기부금을 받은 만큼 사실상 이면계약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것은 물론, 학교가 아닌 재단회계로 거액을 기부받아 회계 불투명성도 크다는 점이다. 사립학교법상 체육관은 학교시설이라 임대 수익은 재단이 아닌 학교로 귀속돼야 한다. 하지만 수익이 재단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온전히 학생들의 교육환경 개선에 쓰이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특히 휘문 재단은 2018년에도 당시 명예이사장 등이 해당 교회로부터 시설사용료 및 기부금 수십억 원을 재단 계좌로 받은 뒤 유용해 내홍을 겪었다. 이후 휘문중 공간 등 임대 시설은 더 늘었지만, 2018년 10월 김 이사장 취임 뒤에도 기부금을 재단 계좌로 받는, 불투명한 회계 관행은 근절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학교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학교와 재단 회계를 구분하지 않은 사례가 다수 발견된다"면서 "학교 수입이 학생들의 고품질 교육에 쓰이도록 교육당국이 철저히 감사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빨갱이' 몰린 엄마 없이 산 43년… 그 아들의 피눈물이 모친 누명을 씻는다

때는 1993년 6월 24일. 경남 거제에서 아파트 관리원으로 일하던 전철수(당시 48세)씨의 눈길이 한 일간지 박스기사에서 멈췄다. '김복연'이라는 할머니의 기구한 운명을 소개한 기사였다. 김씨는 6·25전쟁 발발 직후 인민군에 쫓기는 국군을 도왔지만, 나중에 되레 북한군 부역자로 몰려 감옥에 갇혔다고 했다. 김복연에겐 잃어버린 아들이 있다고도 했다. 불현듯 철수씨 머릿속에 어떤 장면이 번쩍 스쳐갔다. 기사에 이런 내용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연 속에 나오는 '전학철'이란 이름은 달랐지만, 철수씨는 43년 전 자기가 겪은 일이었다고 확신했다. 그렇다면 저 김복연이라는 분은 나의 어머니인가. 고민 끝에 철수씨는 신문에 적힌 전화번호에 연락을 넣어 "서울서 만나자"는 뜻을 전달했다. 김복연씨를 만나 서로 기억의 조각들을 맞췄다. 역시 어머니가 맞았다. 철수씨는 원망하듯 어머니에게 물었다고 한다. "왜 그동안 저를 안 찾으셨나요?" 그랬더니 어머니는 놀라운 사연을 털어놓았다. 기구한 운명의 시작은 1950년 10월. 서른두 살 복연씨가 북한의 남침 탓에 피란을 갔다가 서울로 돌아온 때였다. 복연씨는 별안간 경찰서로 끌려갔다. 대통령 선전물을 제작한 사람들을 인민군에게 밀고했다는 혐의였다. 복연씨가 피란으로 집을 비운 사이, 그 집에 몰래 들어와 살던 사람들이 신고를 넣었다고 했다. 혐의를 부인했지만 고문이 이어졌다. 결국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이라는 이상한 법을 위반했다는 점이 인정되어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특별조치령은 단심제라 판결은 그대로 확정됐다. 복연씨가 수사받는 동안 경찰서 밖으로 내동댕이쳐진 아들 학철(철수씨)은 전쟁고아 수용소에 보내졌다. "착하게 있으면 데리러 오신다"는 말만 믿다가, 1·4후퇴로 제주보육원에 이송되면서 이산가족이 됐다. 학철의 이름은 '맹철수'가 됐고, "눈물이 마를 정도로" 구타에 시달리며 엄마 기억은 잊어버렸다. 복연씨는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아들을 떠올렸다. 병세로 형집행이 정지된 틈을 타 신분을 숨기기 위해 새 가정을 꾸렸지만 10년 만에 발각됐고, 재복역 중 감형돼 1973년에서야 출소했다. 그사이 철수씨는 보육원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전국 공사판을 돌았다. 혈혈단신 철수씨는 어딜 가나 부랑자 취급을 받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엄마와 아들은 1983년 KBS 이산가족 찾기 방송에도 나갔지만, 기억하는 이름∙사연이 달라 서로를 찾지 못했다. 그렇게 영영 만나지 못할 것 같던 모자 상봉의 기회는, 이별 43년 만에 찾아왔다. 75세 노파가 된 복연씨가 TV에 출연해 "빨갱이라는 누명을 벗기 위해 내가 도움을 줬던 국군 청년을 찾고 싶다"는 뜻을 전했고, 이 사연이 실린 기사를 기적적으로 아들이 보게 됐다. 어머니는 아들을 버리신 게 아니었다. 진실을 안 철수씨는 그때부터 어머니 명예회복에 나섰다. 혼자 재판을 준비했다. 일을 그만두고 국립중앙도서관, 검찰, 법원을 들락거리며 기록을 모으고 판례를 뒤적여 재심을 청구했다. 자신의 성도 '맹철수'에서 다시 '전철수'로 바꿨다. 그러나 3년간 이어진 소송의 결과는 기각이었다. 암 투병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던 철수씨는 "일단 좀 쉬자"며 어머니를 위로했다. 결과에 크게 낙심한 복연씨는 이후 가까운 지인에게 사기를 당하고 치매를 앓다 2010년 세상을 떠났다. 무죄를 받지 못하고 어머니가 떠나자, 아들의 가슴엔 후회가 사무쳤다. 그래서 다시 힘을 내, 2017년엔 변호사들 도움을 받아 재심을 청구했다. 그리고 4년 뒤 어머니의 면소(형사소송의 소송조건이 결여되어 기소를 면제하는 것)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검사의 증거만으로는 복연씨 혐의를 인정하기도 부족하다고도 판단했다. 이를 근거로 철수씨와 이부 동생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체포 권한 없는 대학청년단에 의한 체포 △위법 영장 집행 △구금 중 가혹행위 △보육원 강제 입소 △부당 수사 △특별조치령 폐지로 면제돼야 하는 잔여형 집행 등 이유를 달아 22억 원을 청구했다. 사건을 심리한 서울중앙지법은 지난해 6월 청구 이유 중 '위법 영장'과 '가혹행위' 부분만 받아들였다. 증거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또 당시 원고들이 아주 어렸거나 태어나기 전이었다는 이유로, 그들의 정신적 손해에 대한 위자료를 인정하지 않았다. '불법구금과 고문이라는 불법행위가 있었지만 기소·재판·형집행은 모두 합법이고 국가가 부담해야 할 책임은 복연씨에게만 국한된다'는 결론이었다.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철수씨는 "43년간 개같은 인생을 살게 만들어 놓고 이런 판결로 만족하라는 거냐"며 항소했다. 하지만 지난달 27일 나온 2심 판단도 유사했다. 그가 고아로 살아온 40여 년 세월과 복연씨가 생전 겪었던 고통이 좀 더 참작돼 인용 금액이 약 2억 원으로 늘어났을 뿐이었다. 이제 여든을 바라보는 철수씨는 생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소송(대법원 상고심)을 준비한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어머니에게 가해진 유죄 판결, 철수씨 스스로가 부당하게 당해야 했던 고아 대접의 책임을 인정받고 싶기 때문이다. 법률대리를 맡은 장경욱 변호사는 "1·2심은 이 사건이 일련의 불법행위라는 점을 간과해 위자료를 크게 감액했다"면서 "국가에 의해 '간첩'으로 낙인찍힌 복연씨 가족에 대한 피해가 적극 인정돼야 된다"고 밝혔다.

임대아파트에 '억소리' 나는 롤스로이스… "몇 달째 주차"

경기도 한 임대아파트에 고가 외제차가 장기간 주차 중인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일고 있다. 임대아파트에 입주하려면 재산과 자동차 기준을 충족해야 해 입주민 소유 여부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13일 온라인 커뮤니티 '보배드림'에 '경기도 파주 LH 임대아파트(행복주택)에 롤스로이스 무료주차'라는 제목의 게시글이 올라왔다. 글쓴이 A씨는 "임대아파트 등록 가능 차량가액 최대액의 몇 배에 달하는 이런 차가 몇 달째 무료주차를 하고 있다"며 사진 한 장을 공개했다. 누리꾼들은 해당 차량을 롤스로이스 레이스 블랙배지로 추정했다. 이 모델은 대당 가액이 수억 원에 달한다. A씨는 "차량가액이 훨씬 넘어가니 당연히 주차등록 스티커는 없고 방문증도 없고 (이런 경우가) 이 차 외에도 많지만 롤스로이스는 진짜 어이가 없다"며 "처음엔 방문(한 차량)인 줄 알았으나 나갔다 들어오는 것도 봤고 계속 세워놓으니 주차가 맞다"고 주장했다. 또 "국토교통부와 한국토지주택공사(LH), 관리사무소 등에 민원을 넣었으나 조치하겠다는 말뿐 전혀 조치가 없다"고도 했다. 올해 기준 LH 국민임대주택과 행복주택 입주 자격은 부동산과 금융자산, 자동차 등을 포함한 세대 총자산이 3억4,500만 원 이하여야 하고, 자동차는 차량기준가액이 3,708만 원 이하여야 한다. 해당 롤스로이스가 입주민 명의의 차량일 경우 입주자격을 벗어난다. LH는 정기적으로 등록 차량 전수조사를 시행해 입주민의 고가차량 보유 및 주차 등을 제한하고 있다. 임대주택 고가차량 보유자에 대해 재계약 거절, 주차등록 제한 등의 조치를 취하고 있다. 2019년에는 차량가액이 6,327만 원인 메르세데스벤츠 E-300을 보유한 국민임대주택 입주자가 해약됐고, 2020년에는 7,852만 원 상당의 마세라티 르반떼를 소유한 입주자가 적발됐다. LH는 해당 차량이 입주민 소유 차량으로 확인될 경우, 재계약 거부 등의 조치를 취하고 비입주자 차량으로 확인될 경우 주차관리를 더욱 철저히 하겠다는 입장이다. LH 관계자는 본보 통화에서 "입주민의 고가 차량 소유가 매번 문제가 돼 지속적으로 체크하면서 재계약 거부 등의 대책을 시행 중"이라며 "이번 사안도 사실을 파악해 그에 맞게 조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