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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산책

강릉단오제와 범일 국사

성자(聖者)의 동정녀 탄생 신화는 먼 유대 땅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에게도 강릉 출신의 범일(梵日) 국사가 그 신화의 주인공이다. 마을의 한 처녀가 우물가에서 해가 담긴 표주박 물을 마셨다. 그러자 처녀에게 아이가 생겼다. 물속의 해를 마셔 잉태했다는데 누군들 믿어줄까. 처녀는 제집을 떠나 먼 곳에서 아들을 낳고 홀로 키웠다. 바로 이 아들이 큰스님이자 강릉의 수호신으로 불리는 범일이다. 큰스님은 그렇다 쳐도 어쩌다 수호신이 됐는가. 청년 범일이 중국에서 유학해 새로운 불교의 물결에 훈육되고 돌아와 선풍(禪風)을 일으킨 것이 9세기다. 불교에서도 가장 깐깐하다는 선종(禪宗)의 개창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강릉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어 대관령 산신각에 모셔진 때를 나는 정확히 모른다. 나아가 산신 홀로 두기 저어하다고, 곁을 지키던 호랑이가 마을로 내려가 정씨 집안의 딸을 납치하다시피 데려와 짝을 지웠다 하니, 이야기의 향방을 종잡기도 쉽지 않다. 부인은 '여성황'이 되고, 거처는 지금 강릉 시내 한가운데다. 산신은 대관령에, 여성황은 마을에 각기 자리 잡아 세상을 지킨다. 두 분이 한 해 한 번 만난다. 바로 단오를 전후한 한 주가량이다. 합심하여 마을을 지키는 범일 부부에게 강릉 사람들은 조촐한 합방으로 정성스럽게 사례하는 것이다. 매우 실무적인 성(聖)의 세속화 현상이다. 이런 스토리텔링은 비록 중국에서 기원한 단오의 틀을 쓰고 있으나 강릉만의 단오제를 만들었다. 지난 2005년 유네스코가 강릉단오제에 무형문화유산의 영예를 안긴 까닭이다.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아비 모르는 아들로 태어나 홀어머니와 단란하다가 출가한 범일의 초년은 어땠을까. 빙의하듯 그의 생애를 짐작할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한 대목 있다. 중국 유학 중일 때 범일이 명주(明州)의 개국사(開國寺)에 이르러, 왼쪽 귀가 잘린 한 어린 스님을 만난 것은 830년경이었다. 말석에 앉아 있던 범일에게 '저 또한 같은 향리 사람, 본국으로 돌아가시거든 모름지기 제 집을 지어 달라' 한다. 뚱딴지같은 소리다. 다만 한눈에도 가련한 어린 스님의 처지가 범일에게는 남 같아 보이지 않았으리라. 집이란 어머니 계신 위안의 소식이고, 출가자에게 찾아올 '이룸'의 다른 말이다. 낮은 자리에서 사람의 작은 소망까지 알았기에, 선정(禪定)의 일념 와중에 성자는 어느 순간 종교의 틀도 아랑곳 않고, 산신이면 어떠냐고 세속으로 향했으리라 나는 믿는다.

기고

생물다양성의 가치와 기업 경영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와 그들의 상호작용으로 이뤄진 '생태계'는 서로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이러한 생명체와 생태계의 '다양성'은 인류 생존에 필요한 식량, 깨끗한 물과 공기 같은 생태계서비스의 기반이 되며 의약품, 화장품 등의 산업에도 활용된다. 또한 기후변화와의 상호영향으로 인해 기후변화 대응 해법으로도 생물다양성 보전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생물다양성은 기업들도 주목해야 하는 이슈다. 생물다양성 손실로 인한 경영 위기(리스크)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경제포럼(WEF)은 각국의 국내총생산(GDP) 절반 이상이 생태계서비스에 의존하고 있다며 올해 초 '생물다양성 손실과 생태계 붕괴'를 향후 10년간 세계가 직면할 심각한 위기 중 3위로 꼽았다. 세계은행은 "생태계서비스가 붕괴하면 2030년까지 전 세계의 국내총생산(글로벌 GDP)이 매년 2조7,000억 달러씩 감소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기업의 행동 변화를 위한 압박도 거세지고 있다. 2022년 말 캐나다에서 열린 제15차 생물다양성협약 당사국총회에서 196개 국가는 기업 활동이 생물다양성에 미치는 영향과 의존도 등을 평가해 공개하는 '자연자본 공시' 제도 도입에 합의했다. 세계 굴지의 투자사들은 기업의 생물다양성 영향 정도를 평가해 투자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생물다양성을 고려하지 않는 경영 방식으로는 글로벌 경쟁이 어려운 시대가 도래할 수 있다. 우리 정부는 지난해 말 생물다양성 보전과 이용의 선순환 구축을 위해 제5차 국가생물다양성전략을 수립했다. 국제적 흐름에 맞춰 국내 자연자본 공시 표준체계를 구축하고, 녹색분류체계(K-Taxonomy)에 생물다양성 보전 경제활동을 구체화한다는 계획을 담고 있다. 특히 지난 3월에는 국제사회의 자연자본 공시 논의에 발 빠르게 대응하기 위해 산업계, 회계·법무법인, 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자연자본 공시 협의체'도 발족했다. 이 협의체는 자연자본 공시와 관련한 국제 동향 및 정보 공유, 자연자본 공시 대응을 위한 지침서 작성, 실무자 교육 등 우리 기업의 대응 역량 강화를 지원할 예정이다. 생물다양성 보전과 이용은 기업에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세계경제포럼은 생물다양성을 보전하면 농업, 제조업, 금융 등의 분야에서 매년 10조 달러의 새로운 사업 기회를 창출한다고 추산했다. 우리 기업도 나서고 있다. 자연자본 공시에 대응하고, 새로운 사업 기회와 가치를 만들기 위해 금융, 제조, 바이오 등 각 분야의 업체들이 선도적으로 생물다양성 보전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오는 22일 '세계 생물다양성의 날' 공식 주제는 '생물다양성을 위한 노력에 우리 모두 함께하자(Be part of the Plan)'다. 정부와 기업의 협업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다. 생물다양성의 날이 생물다양성의 가치를 다시 한번 되새기고, 모두의 협력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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