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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산책

영화 '파묘', 현대에도 명당은 존재할까?

한국 영화계에서 1,000만 관객은 명예의 전당과 같다. 최근엔 ‘파묘’가 오컬트라는 장르의 한계를 넘어서며 영화사에 큰 획을 긋고 있다. 나는 고건축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명당(明堂)에 대해서도 나름 이해도가 있다는 의미다. 한국 고건축에는 으레 명당론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명당이란 '밝은 집'이라는 뜻이다. 중국 문명의 토대를 확립한 주나라 때, 천자(군주)는 남쪽으로 향한 양명(陽明)한 대전에서 정사를 폈다. 이 집이 바로 명당이다. 즉 경복궁의 근정전이나 창덕궁의 인정전이 주나라 때는 명당으로 불렸다는 말씀. ‘양명한 최고 건축’이라는 함의는 이후 ‘산 사람을 위한 좋은 삶터’와 ‘죽은 이를 모시는 길한 묏자리’라는 의미로 분화된다. 이를 ‘양택’과 ‘음택’이라고 한다. 요즘엔 명당 하면 묏자리가 먼저 떠오르지만, 본래 명당은 최고의 건물이자 삶터의 의미였다. 고건축 전공자다 보니, 간혹 명당에 관해 물어보시는 분들도 있다. 이때 나는 “요즘은 터 명당보다도 도시계획이 명당”이라고 답해준다. 상업지역으로 지정되면 명당을 넘어선 진정한 명당이 되지 않는가! 서울의 강남은 본래 제대로 된 사람들이 사는 땅이 아니다. 한강의 북쪽은 양명한 곳이므로 한양(漢陽)이 된다. 이에 반해 강남은 음기가 서린 한음(漢陰)이다. 그러나 서울의 도시계획은 한음을 선망의 명당으로 바꿔 버렸다. 한양을 넘어선 한음의 시대가 펼쳐진 것이다. 영화 파묘에는 "새로운 명당은 더 이상 없다"는 대사이 나온다. 조선에는 명당에 진심인 ‘덕후’들이 차고 넘친다. 그런데 어찌 새로운 명당이 있을 수 있겠는가! 100% 맞는 말이다. 또 요즘 지관이 수요가 많았던 예전 시절의 지관처럼 안목이 밝을 수도 없는 것이고. 해서 나는 “굳이 명당이 필요하면, 잘나가던 양반집의 이장한 묏자리를 찾으면 된다”고 말해준다. 요즘은 관리 문제로 옛 묘도 파묘해서 납골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이런 곳을 찾으면 명당을 구하는 것도 어렵지 않은 것이다. 어떤 분은 청와대나 서울 현충원이 명당이라고 한다. 그럼 나는 “그 자리가 그렇게 좋았다면, 왕궁 건물이나 왕릉이 들어서지 않았을까요?”라고 반문한다. 좋은 터에 대한 추구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시 합리적인 관점을 넘어설 정도의 일은 아니다. 만일 명당의 영향이 지대하다면, 조선은 세계 최강국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고

ARF, 글로벌 중추 국가 외교의 장으로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ARF 전문가·저명인사’(ARF EEPs) 회의가 오는 25일부터 이틀간 서울에서 열린다. 27개 회원국의 외교·안보 분야 전문가로 구성된 이 회의체는 아세안 회원국과 비아세안 회원국이 공동의장을 맡아 매년 번갈아 가며 회의를 개최하는 1.5 트랙 성격을 띤다. 올해는 우리나라와 브루나이가 공동의장 자격으로 회의를 주재한다. 그리고 이번 제16차 회의 결과는 올해 ARF 외교장관회의에 제출될 예정이다. ARF는 인도·태평양 지역의 다자 안보협력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협의체다. 동북아와 달리 동남아시아에서 다자 안보협력이 상당한 진전을 거둔 배경에 대해 전문가들은 “아세안의 역할이 중요했다”고 입을 모은다. 사실 동아시아 지역에 상존하는 역내 갈등과 위험 요소들로 인해 다자 안보협력을 추진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아세안으로 결속된 동남아 국가들은 역외 국가들과의 대화·협력 기반을 강화해 다자 안보협력의 가능성을 열었다. 마르티 나탈레가와 전 인도네시아 외교부 장관에 의하면, ARF는 과거 동서 강국 경쟁 구도의 대상물에서 아세안을 통해 역내 구도의 설계자로 거듭난 동남아시아의 대전환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글로벌 다자 안보 협의체로 자리 잡은 ARF는 우리에게 중요하면서도 동시에 도전적인 다자외교의 현장이기도 하다. 남북한이 함께 회원국으로 가입한 유일한 지역협의체로, 외교장관 회의 기간 중 남북한 외교부 장관이 만나 회담 또는 대화를 할 수 있는 소통의 장으로 주목받았다. 또한 외교장관회의 기간 중 별도의 외교부 장관 회동을 통해 역내 주요 국가와의 외교 현안을 논의하고 이들 국가와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관리하는 유용한 기회로 활용하고 있다. 반면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 등 우리 외교·안보에 매우 중요한 이슈들이 늘 주요 의제로 상정되고 있어 다양한 입장을 가진 회원국을 상대로 이러한 이슈에 대한 우리 입장을 관철해야 하는 외교력의 중요한 시험대이기도 하다. 이번 ARF EEPs 회의는 우리의 글로벌 중추 국가 비전을 실천할 좋은 기회다. ARF의 관심사에 부합하는 심도 있는 논의와 참신한 아이디어를 담은 보고서를 제출, 일부 전문가들이 ‘단순한 대화의 장’이라고 폄하하는 ARF 회의의 실효성 제고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전통적 의제에 더해 경제 안보, 사이버 안보 등 신흥 안보 이슈에 대한 폭넓은 논의로 ARF의 글로벌 복합 위기 해소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올해는 ARF 출범 30주년이자 한-아세안 대화 수립 35주년이기도 하다. 앞서 우리 정부는 아세안과의 관계를 확대·격상하기 위해 한-아세안 연대 구상(KASI)을 제안했다. 이런 의미 있는 해에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ARF EEPs 회의는 KASI를 구현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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