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선 구제, 후 회수’ 전세사기 지원은 신중해야

입력
2024.05.24 13:04
수정
2024.05.24 15:05
25면

23일 오후 서울 한국부동산원 서울강남지사에서 열린 '전세사기특별법' 개정안에 대한 종합토론회에서 김규철 국토교통부 실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23일 오후 서울 한국부동산원 서울강남지사에서 열린 '전세사기특별법' 개정안에 대한 종합토론회에서 김규철 국토교통부 실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세’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의 저자는 현행 전세제도가 고려시대 전당 제도에서 시작됐다고 설명한다. 전당 제도는 오늘날 전당포와 유사한 개념으로서 급전이 필요한 사람이 자신이 소유한 물건을 맡기고 돈을 빌리는 사금융의 형태라고 보면 될 것이다. 현재의 전세제도는 임대인이 자신의 부동산을 빌려주고 보증금을 맡아 활용한다는 측면에서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전세는 사실상 사금융의 기능을 하고 있으며, 채권자(임차인)도 모르는 사이 채무자(임대인)가 바뀔 수 있는 것과 같이 태생적 한계가 존재한다.

이러한 한계를 보완하고 임차인을 보호하기 위해 정부는 다양한 대책을 마련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선한 의지를 악용한 사기꾼들로 인해, 전세는 전세사기라는 이름으로 서민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끼치는 도구가 됐다. 이에 야당에서는 ‘선 구제 후 회수’를 내용으로 한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으나, 이는 여러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먼저, 피해자들의 보증금반환채권을 매입해 ‘선 구제’하는 재원으로 주택도시기금을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 기금은 무주택 서민들이 ‘내 집 마련’을 위해 모으는 청약저축이 핵심 재원이다. 정부가 서민들로부터 잠시 빌린 돈을 회수 가능성이 낮은 채권을 매입하는 소모적인 지원에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부실한 채권 매입으로 인한 기금 손실은 현재도 급속하게 고갈돼 가고 있는 기금 운용에 부담을 가중하게 된다. 그로 인한 국민주택과 임대주택 건설사업 등 기금 본연의 목적에 따른 주거복지 사업 차질은 국민들의 피해로 전가될 우려가 있다.

공공이 매입하게 될 개별 피해자들의 보증금 채권의 정확한 가치를 평가하는 과정도 만만치 않다. ‘공정한 가치평가’라는 기준도 모호하지만, 피해주택을 둘러싼 권리관계와 예상되는 낙찰가격의 산정도 경매 이전에는 정확하게 산정하기 어렵다. 명확하지 않은 가격 기준은 분쟁으로 이어지고, 그에 따른 혼란의 피해는 피해자들의 몫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재도 정부는 전세피해자들을 위한 피해자 결정과 지원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데 피해 임차인이 아닌 전세사기의 주범이 피해자인 것으로 속여 피해자 결정 신청을 하는 경우도 더러 있으므로 이러한 상황에서 '선 구제'라는 지원이 도입되면 피해자 결정을 위해 온갖 부당한 방법이 횡행하게 될 수 있다.

개정안에 대해 많은 전문가가 사적 자치의 영역에 대한 지나친 국가 개입, 유사 범죄와의 형평성 문제, 과도한 재정지출 및 위헌 소지 등을 이야기한다. 전적으로 맞는 말이다. 아울러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개정안은 실무적으로 여러 문제가 예견되는 등 합리적이지 않다. 오히려 현행 특별법을 보완해 피해자 선정의 범위를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것과 부족하다고 거론되는 지원 내용을 보완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최인철 에이원감정평가법인 감정평가사

관련 이슈태그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