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수자 포용했던 교황, 비공개 회의서 동성애 혐오표현 사용"

입력
2024.05.28 16:00
수정
2024.05.28 23:43
12면
구독

'동성 커플에게도 축복 가능' 프란치스코 교황
동성애자에 멸칭 사용… "이미 '호모' 너무 많아"
일각에선 "모국어 아니어서 단어 무게 모른 듯"
교황청 "불쾌감 느낀 사람들에게 사과" 성명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22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주간 알현에서 연설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22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주간 알현에서 연설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프란치스코(87) 교황이 성소수자의 사제직 수행을 논하는 비공개 회의에서 동성애자를 비하하는 이탈리아어 단어를 사용했다. 그는 이 회의에서 동성애자의 신학교 입학도 반대한 것으로 전해졌다. 성소수자 친화적 교황이라는 그간의 평가와 대조되는 행보다. 다만 회의에 참석한 일부 주교는 교황이 '외국어로 말하는 과정에서 단어의 속뜻을 모르고 사용한 듯하다'고 추측했다.

"교회에 '호모' 너무 많아" 발언 논란

영국 로이터통신, 가디언 등은 27일(현지시간) 복수의 이탈리아 언론을 인용해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탈리아 주교들과 회의하던 중 동성애자에 대해 모욕적인 단어를 썼다"고 보도했다.

이탈리아 매체 아디아네크로노스통신, 코리에레델라세라 등에 따르면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20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이탈리아주교회(CEI)와 비공개 회의를 가졌다. 이 자리에선 게이(남성 동성애자)의 가톨릭 신학교 입학 허용 여부가 논의됐다.

가디언은 이탈리아 매체 4곳을 종합해, 회의에서 교황이 "모두를 포용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게이가 이중 생활을 할 위험이 있다"며 "교회에 이미 너무 많은 '프로치아지네(frociaggine)'가 있다"는 발언을 했다고 전했다. 이탈리아어 '프로치아지네'는 게이를 일컫는 멸칭으로, 한국의 '호모'에 가까운 표현이다.

성소수자 친화적 행보? "일관성 없어" 지적도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18일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베로나=로이터 연합뉴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18일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베로나=로이터 연합뉴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소수자를 옹호하며 동성애를 죄악시하는 가톨릭계에 균열을 만든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교황으로 즉위한 2013년 "어떤 사람이 동성애자이면서 선의를 갖고 신을 찾는다면, 내가 누구라고 심판하겠는가"라고 발언해 화제가 됐다. 2016년에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동성애자들을 대했던 방식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지난해 12월에는 동성 커플에 대한 로마 가톨릭 사제의 축복을 공식 승인했다.

그러나 성소수자에 대한 그의 메시지엔 일관성이 없다는 지적도 있다. 로이터는 2018년 그가 이탈리아 주교들을 만나, "사제직 지원자들을 신중하게 심사하고 동성애자로 의심되는 사람은 거부하라"고 말했다고 지적했다. 지난 4월 교황청 선언문에는 트랜스젠더의 성전환 수술이 '인간 존엄성에 대한 모독'이라고 비난하는 내용도 담겼다.

교황은 이번에 문제가 된 회의에서 동성애자의 신학교 입학에도 반대 의사를 거듭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코리에레델라세라에 따르면, CEI는 지난해 11월 기존에 금지됐던 동성애자의 신학교 입학을 조건부 허용하도록 지침을 바꿨다. 성생활을 하지 않는 동성애자는 교리상 문제 되지 않는다는 취지였다. 이 지침은 교황청 승인을 받아야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CEI와의 비공개 회의에서 동성애자의 신학교 입학에 대해 "강경한 반대로 보이는 의견"을 내놨다고 신문은 전했다.

다만 혐오표현에 대해선 교황이 외국어를 쓰다가 말실수를 했을 것이란 의견도 나왔다. 코리에레델라세라는 "일부 주교들에 따르면,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 언어에서 그 단어가 얼마나 무겁고 공격적인지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 분명했다"며 "이탈리아어는 그의 모국어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아르헨티나 국적인 프란치스코 교황의 모국어는 스페인어다.

논란이 커지자 교황청은 결국 공식 사과했다. 교황청은 28일 성명을 통해 "교황은 동성애 혐오적인 용어로 공격할 의도가 전혀 없었으며, 불쾌감을 느낀 사람들에게 사과의 뜻을 전한다"고 밝혔다.

김나연 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