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포’ 대신 ‘소총부대’ 출동?... 여름 극장가 ‘텐트폴’이 사라졌다

입력
2024.06.14 11:0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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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비 가장 많이 들어간 '탈출'이 185억 원
'탈주' 등 100억 원대 안팎 중급 영화들 몰려
"여름 성수기 옛말" "덩치 앞세운 흥행몰이 끝"

21일 개봉하는 '하이재킹'은 올여름 시장을 여는 영화로 꼽힌다. 제작비 140억 원으로 올여름 영화 중 많은 돈이 들어간 쪽에 속한다. 키다리스튜디오 제공

21일 개봉하는 '하이재킹'은 올여름 시장을 여는 영화로 꼽힌다. 제작비 140억 원으로 올여름 영화 중 많은 돈이 들어간 쪽에 속한다. 키다리스튜디오 제공

올여름 극장가가 달라졌다. ‘텐트폴(텐트 지지대처럼 시장을 떠받치는 대작)’은 사라진 반면 제작비를 적게 들인 중급 영화들이 잇달아 개봉한다. 극장가 최고 대목으로 여겨지던 여름 흥행 전선에 ‘대포’ 대신 ‘소총부대’가 출동하는 셈이다. 지난해 여름 흥행 참사가 영향을 준 것으로 분석된다. 코로나19 이후 여름 극장가 재편의 신호탄이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100억 원 아래 영화들도 다수

공포와 코미디를 결합한 이색적인 영화 '핸섬가이즈'의 제작비는 49억 원이다. 예년 같으면 여름 극장가에서 보기 힘든 중급 영화다. NEW 제공

공포와 코미디를 결합한 이색적인 영화 '핸섬가이즈'의 제작비는 49억 원이다. 예년 같으면 여름 극장가에서 보기 힘든 중급 영화다. NEW 제공

13일 영화계에 따르면 21일 개봉하는 ‘하이재킹’을 필두로 한국 영화들이 8월 중순까지 1주 간격으로 잇달아 선보인다.

영화들의 면면은 대작과는 거리가 있다.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내달 12일 개봉)와 ‘하이재킹’이 그나마 제작비가 눈에 띄게 들어간 영화다. ‘탈출’는 185억 원(마케팅비 제외)으로 올여름 영화 중 가장 많은 돈이 들어갔다. 지난해 가장 덩치가 컸던 ‘더 문’ 제작비(286억 원)에 비하면 100억 원가량 적다. 짙은 안개가 낀 공항대교에서 차량 연쇄 추돌 사건 후 벌어지는 일을 다룬 영화로 컴퓨터그래픽(CG)에 적지 않은 돈이 소요됐다.

‘하이재킹’은 140억 원이 투입됐다. 지난해 여름 ‘빅4’(‘더 문’ ‘비공식작전’ ‘콘크리트 유토피아’ 등) 중 제작비가 가장 적었던 ‘밀수’(175억 원)보다 적은 제작비다. 1971년 발생한 여객기 납치 사건을 스크린에 옮겼다.

영화 '탈주'는 제작에 100억 원가량이 투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대작이라는 수식을 붙이기는 어렵다.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탈주'는 제작에 100억 원가량이 투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대작이라는 수식을 붙이기는 어렵다.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제공

‘탈주’(내달 3일 개봉)와 ‘행복의 나라’(8월 개봉)는 100억 원가량이 각각 들었다. ‘탈주’는 북한을 벗어나 남한으로 가려는 북한군과 이를 막으려는 또 다른 북한군의 사연을 그렸다. ‘행복의 나라’는 명령에 따라 대통령 시해에 가담한 한 군인과 그를 살리려는 변호사를 스크린 중심에 내세웠다. 제작비가 급상승한 최근 한국 영화계 사정을 감안하면 제작비 100억 원은 대작 범주에 넣기 힘들다.

100억 원 아래 제작비로 여름 시장을 노리는 영화가 다수이기도 하다. 공포와 코미디가 결합한 ‘핸섬가이즈’(26일 개봉)는 49억 원, 1999년을 배경으로 한 청춘물 ‘빅토리’(8월 14일 개봉)는 83억 원으로 각각 만들어졌다. 항공사를 배경으로 한 코미디 ‘파일럿’(내달 31일 개봉)은 제작비가 100억 원 미만으로 알려졌다.

2022년과 지난해 악몽 ‘학습효과’

지난해 여름 개봉한 '더 문'은 마케팅비를 제외하고도 286억 원이 들어간 영화였으나 관객 51만 명에 그치며 흥행 참패를 맛봐야 했다. CJ ENM 제공

지난해 여름 개봉한 '더 문'은 마케팅비를 제외하고도 286억 원이 들어간 영화였으나 관객 51만 명에 그치며 흥행 참패를 맛봐야 했다. CJ ENM 제공

올여름 극장가에 텐트폴이 사라진 데에는 ‘학습효과’의 영향이 크다. 2022년과 지난해 여름 흥행이 기대치를 밑돌면서 ‘여름=성수기’라는 인식이 급속히 바뀌고 있다.

특히 지난해 여름은 영화계에는 악몽과도 같았다. 여름 ‘빅4’의 제작비 총액만 840억 원가량이었으나 박스오피스는 2022년보다 더 쪼그라들었다. 지난해 7, 8월 한국 영화 관객수는 1,271만 명으로 2022년(1,850만 명)보다 579만 명이 줄었다. 마스크를 벗고 맞이한 첫 여름이라 극장가 기대감이 컸던 점을 감안하면 초라한 흥행 성적표였다.

지난해와 올해 여름 주요 한국 영화 제작비

2023년(제작비, 관객) 2024년(제작비, 개봉일)
더 문(286억 원, 51만 명)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185억 원, 7월 12일)
비공식작전(200억 원, 105만 명) 하이재킹(140억 원, 21일)
콘크리트유토피아(189억, 384만 명) 행복의 나라(100억 원대, 8월)
밀수(175억 원, 514만 명) 탈주(100억 원대, 7월 3일)

코로나19 이후 성수기와 비수기가 모호해진 최근 극장가 변화 역시 영향을 줬다. ‘서울의 봄’(2023)과 ‘파묘’는 전통적인 비수기인 11월과 2월에 각각 개봉해 관객 1,000만 명에 이르렀다. 투자배급사 NEW의 류상헌 유통전략팀장은 “올해는 ‘여름 성수기=블록버스터 개봉’이라는 불문율이 깨지기 시작하는 해라 볼 수 있다”며 “중급 영화 개봉이 강세인 건 각 배급사들이 (지난해) 경험을 바탕으로 시장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덩치를 내세우며 흥행몰이를 하던 시절은 이제 지났다는 주장도 있다. ‘스타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데다 스타 감독이 연출했고 많은 제작비가 들어간 영화’라는 식의 홍보 문구가 더 이상 관객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황재현 CGV 전략지원 담당은 “관객들이 더 이상 제작비 규모를 신경 쓰지 않는 듯하다”며 “입소문을 바탕으로 좋은 콘텐츠를 즐기는 쪽으로 관람 형태가 바뀌고 있다”고 진단했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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