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 시인 "한국일보 편집국 폐쇄당한 날, 시인으로서 함께 싸웠다"

입력
2024.06.18 10:00
21면

[문학 人 한국일보] (4) 시인 조정
200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2013년 '옛 경영진 주도' 한국일보 사태 때
광화문서 "기자들 지지" 1인 피켓 시위
"한국일보, 세상의 벽 베며 나아가기를"

편집자주

한국일보는 1954년 창간 연재소설 염상섭의 ‘미망인’을 시작으로 이듬해 문을 연 신춘문예, 한국일보 문학상 등으로 늘 문학계와 함께 걸어왔습니다. 역사와 더불어 많은 곡절을 겪고 격랑을 넘어온 한국문학의 기록자이자 동반자의 역할을 한 한국일보가 귀한 글로 신문을 빛내준 문우(文友)들과 창간 70주년의 기쁨을 나눕니다.

조정 시인. 본인 제공

조정 시인. 본인 제공

내게 한국일보 사옥은 '서울 중학동'과 '인왕산'으로 새겨져 있다. 200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자 인터뷰 후 사옥 옥상으로 사진을 찍으러 갔을 때 마주친 풍경은 예상했던 경복궁 뜰이 아니라 인왕산이었다. 차고 단단한 암벽이 겨울바람을 뿜으며 육중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과연 제대로 된 시인 노릇을 할 수 있을지 불확실한 가운데 받아 든 신춘문예 당선 소식보다 선명하고 생생한 실체였다.

2000년대 초 워크아웃 상태였던 한국일보가 사옥을 매각했다는 소식, 옛 사옥 터에 새 빌딩이 완공됐다는 소식을 들으며 몇 년이 흘렀다. 한국일보가 중학동으로 복귀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은 채 2013년에 소위 ‘한국일보 사태’가 터졌다.

한국일보 사태는 외압이 아니라 옛 경영진 내부 갑질에 의한 기자 탄압이었다. 전 사주 일가의 방만한 경영으로 중학동 복귀가 불가해졌다는 것, 기자들을 길들이려는 경영진에 의해 편집국이 봉쇄되었다는 것, 사측이 갑질에 반발하는 기자들의 편집국 출입을 막고 기사 작성·편집 시스템 접속을 차단했다는 것, 경영진 측에 선 기자 몇몇이 ‘짝퉁 한국일보’를 제작했다는 것 등 한국일보 기자들의 수난사가 알려졌다. 서울역과 광화문에서 "저는 한국일보 기자입니다"라는 피켓을 든 기자들의 1인 시위는 가슴 아픈 광경이었다.

한국작가회의에서 성명서를 냈고, 나도 광화문에서 "저는 시인 조정입니다. 한국일보 기자들을 지지합니다"라는 피켓을 들었다. 땡볕과 지열이 뜨거운 7월이었다. 다가와 사진을 찍으며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거듭 인사한 젊은 기자의 표정이 진지하고 절박해서 오히려 미안했다. 요즘도 한국일보 기사를 마주칠 때마다 드는 공연한 측은지심은 그날 광화문에서 보았던 젊은 기자의 표정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2013년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검찰에 고발된 옛 경영진이 용역을 동원해 편집국을 폐쇄한 ‘한국일보 사태’ 때 수많은 문인이 한국일보 기자들을 응원했다. 당시 편집국이 있었던 서울 중구 한진빌딩을 찾은 문인들이 봉쇄 현장을 둘러보고 기자들에게 격려 발언을 하고 있다. 고 황현산 고려대 불문과 교수, 김정환 시인ㆍ소설가 등의 모습이 보인다.

2013년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검찰에 고발된 옛 경영진이 용역을 동원해 편집국을 폐쇄한 ‘한국일보 사태’ 때 수많은 문인이 한국일보 기자들을 응원했다. 당시 편집국이 있었던 서울 중구 한진빌딩을 찾은 문인들이 봉쇄 현장을 둘러보고 기자들에게 격려 발언을 하고 있다. 고 황현산 고려대 불문과 교수, 김정환 시인ㆍ소설가 등의 모습이 보인다.


2013년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검찰에 고발된 옛 경영진이 용역을 동원해 편집국을 폐쇄한 ‘한국일보 사태’ 때 수많은 문인이 한국일보 기자들을 응원했다. 당시 편집국이 있었던 서울 중구 한진빌딩을 찾은 문인들이 봉쇄 현장을 둘러보고 기자들에게 격려 발언을 하고 있다. 고 황현산 고려대 불문과 교수, 김정환 시인ㆍ소설가 등의 모습이 보인다.

2013년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검찰에 고발된 옛 경영진이 용역을 동원해 편집국을 폐쇄한 ‘한국일보 사태’ 때 수많은 문인이 한국일보 기자들을 응원했다. 당시 편집국이 있었던 서울 중구 한진빌딩을 찾은 문인들이 봉쇄 현장을 둘러보고 기자들에게 격려 발언을 하고 있다. 고 황현산 고려대 불문과 교수, 김정환 시인ㆍ소설가 등의 모습이 보인다.


한국일보가 내게 처음 찾아온 건 1965년이었다. 심심산골인 전남 장성군 북하면의 약수 국민학교까지 소년한국일보 백일장팀이 찾아왔다. 도서실도 없는 산골 학교였다. 읽을 책도 변변찮았던 아이들에게 백일장이란 전혀 새로운 경험이었다. 참신한 긴장감에 제법 팽팽한 마음으로 설명을 들은 후 우리는 나눠준 원고지를 무릎에 얹고 글을 지었다. 백일장에서 상 받은 것을 계기로 부모님은 소년한국일보 구독을 신청하셨다. 교무실 책장에 있는 동화책이나 세계의 위인전도 재미있었지만, 신문의 동화, 만화, 교양 기사들은 새롭고 생생한 현실감이 있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 소년한국일보에는 중학교 입학시험 준비를 위한 모의고사 문제가 일주일에 한 번씩 4면에 걸쳐 실리기도 했다. 국가는 세계은행에서 차관을 얻어와 교육 투자를 하고, 부모들은 끼니를 줄이며 자녀 교육에 전념하던 빈곤기에 소년한국일보는 유용하고 따뜻하고 적극적인 문화 유모에 가정교사 역할까지 해주었다.

그 한국일보의 기자가 35년이 지난 1999년 12월 23일 오후에 전화를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한국일보입니다.”
“네, 그런데요?”
“‘이발소 그림처럼’이라는 시 한국일보에 보내셨죠? 신춘문예 당선되셨어요.”

그렇게 시인이 되어 24년째 시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다. 한국일보 신춘문예는 스스로 묵은 정신을 베며 제 보법을 다스리는 시인을 많이 배출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1980년대 이후부터만 보아도 걸출한 시인들이 촘촘하다. 한국일보 출신 시인들과 연말에 모여 안부를 나누고 새해의 당선자를 축하해주던 일이 끊긴 지는 10년이 넘었다. 만나는 일에는 열심이 없지만, 꿋꿋하게 자기를 갱신하며 써내는 시집들을 보며 건재를 확인한다.

200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에서 시 부문에 당선된 조정(왼쪽 두 번째) 시인의 모습이 보인다. 홍인기 기자

200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에서 시 부문에 당선된 조정(왼쪽 두 번째) 시인의 모습이 보인다. 홍인기 기자

우리에게 첫 응원을 보내주었던 한국일보가 참신하게 세상의 벽을 베며 나아가기를 기원한다. 70년 동안 한국 사회를 기록하고 분석해온 한국일보가 녹턴 F Minor, Op.55를 연주하는 호로비츠처럼 완숙하게, 인간사의 사건사고 속에서 공존의 기운을 살려내기 바란다. 얼마 전 한국일보 새 사옥 준공식이 서울 갈월동에서 진행되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쿠차에서 구마라습의 동상을 보고 느꼈던 충격과 비등한 설렘을 주었던 중학동 사옥의 인왕산이 떠올랐다.


조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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