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직전 청룡기 우승 후 학도병 참전한 대구 야구소년

입력
2024.06.24 17:00
수정
2024.06.25 09:48
24면

대구상중 1950년 6월 17일 청룡기 우승
유망 야구선수 3명 학도병 참전, 전사
주장은 유해 수습... 2명은 무명용사로 남아

한국전쟁 발발 20일 뒤인 1950년 7월 15일 학도병에 자원한 대구상중 학생들이 출정식을 갖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여기에는 야구부원 3명이 출전했다 사망했다. 대구상원고총동창회 제공

한국전쟁 발발 20일 뒤인 1950년 7월 15일 학도병에 자원한 대구상중 학생들이 출정식을 갖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여기에는 야구부원 3명이 출전했다 사망했다. 대구상원고총동창회 제공

한국전쟁 발발 일주일 전인 1950년 6월 18일 서울운동장(옛 동대문운동장)에서는 제5회 청룡기 전국중등(현 고교)야구선수권대회 결승전이 열렸다. 이날 대구공립상업중학교(대구상고의 전신, 현 대구상원고)는 부산 동래중(현 동래고)을 2 대 1로 꺾고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우승의 기쁨도 잠시였다. 전쟁이 터지면서 이 대회 주전선수였던 10대 후반의 박상호, 이문조, 석나홍 대구상중 야구부원 3명이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했다. 군번줄도 없이 낙동강전선에 투입된 그들의 손에는 야구 배트와 글러브 대신에 총과 수류탄이 쥐여졌다. 그리고 이들 야구 소년들에게는 다음 대회가 영원히 허락되지 않았다. 한국전쟁 당시 대구상원고에서는 모두 54명의 학생이 학도병으로 참전해 이들 야구부원을 포함한 19명이 전사했다. 배선봉 대구상원고 총동창회장은 최근 한국일보와 만나 “주장 박상호 선수의 유해만 수습되고 이문조, 석나홍 선생은 공식 기록이 없어 ’무명 전사자‘에 포함됐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학도병으로 출정한 대구상중 야구부 소년들의 이야기는 지난해 나온 대구상원고의 '100년사'에 실렸다가 최근 세상에 알려졌다. '100년사'에는 "당시 학도병은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하고 계급장도 없이 적진에 돌격해 희생이 컸으며 특히 안강전투에서 산화하는 비극이 많았다"고 기록돼 있다.

대구상원고 개교 100주년 역사관에는 빛바랜 학도병 출정 깃발과 제5회 청룡기 야구대회 우승 트로피가 전시돼있다. 당시 학교 측은 목숨을 걸고 전장에 나서는 학생들에게 ‘출정 깃발’을 하나씩 나눠 주며 무운장구를 기원했고, 당시 학도병으로 참전한 김경수(24회) 선생이 가보처럼 간직해오다가 1994년 모교에 기증했다.

1950년 6월 제5회 청룡기 야구대회에서 우승 상장을 받는 주장 대구상중 박상호 선수. 박상호 선수는 학도병으로 참전해 순국했다. 대구상원고총동창회 제공

1950년 6월 제5회 청룡기 야구대회에서 우승 상장을 받는 주장 대구상중 박상호 선수. 박상호 선수는 학도병으로 참전해 순국했다. 대구상원고총동창회 제공

배선봉 동창회장은 “ 대구상원고 야구부 학도병의 참전과 전사의 역사는 1942년 일제에 저항해 싸운 대구상업학교 학생(26명)들의 ’태극단 학생독립운동‘의 얼과 정신을 계승한 것”이라며 "총동창회는 앞으로 학도병으로 전장에 뛰어들어 순국한 야구부원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열어 조국을 위해 산화한 호국 정신을 널리 알리겠다"고 말했다.

대구상원고 배선봉(왼쪽) 총동창회장과 류진권 교장이 대구상원고 100주년 역사관에서 6·25한국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출정한 김경수 선생의 출정 깃발과 청룡기 우승컵이 나란히 전시된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정인효 기자

대구상원고 배선봉(왼쪽) 총동창회장과 류진권 교장이 대구상원고 100주년 역사관에서 6·25한국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출정한 김경수 선생의 출정 깃발과 청룡기 우승컵이 나란히 전시된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정인효 기자






대구= 정인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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