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등기 전세사기' 덫, 겨우 풀었지만 정부는 없었다 [기자의 눈]

입력
2024.06.20 04:30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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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8일 서울 용산구 후암동 일대 빌라 단지. 연합뉴스

5월 28일 서울 용산구 후암동 일대 빌라 단지. 연합뉴스

3월 7일 <전세사기꾼의 덫 '선순위 가등기'> 기획기사를 첫 보도하고 후속 기사도 여러 번 냈다. 그런 와중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기자에게 사건을 처음 제보해 준 피해자가 1년여 만에 전세사기꾼이 설정한 가등기를 말소해 지금 살고 있는 빌라를 드디어 경매로 낙찰받을 수 있게 됐다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기적 같은 일"이라며 울먹였다. 그가 문제 해결을 위해 지난 1년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 줄 알기에 기쁘면서도 씁쓸한 마음이 컸다. 그의 말마따나 정말 기적에 가까운 일이기에. 실제로 취재 초반 적잖이 당황했다. 전세사기 기사를 많이 써 웬만한 유형은 안다고 생각했지만, 이 사례는 완전 새로운 데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싶을 만큼 법적 허점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집주인의 이중 매매를 막으려고 예비 매수자가 등기에다 일종의 매매 예약을 걸어두는 게 가등기다. 가등기 주택은 신청자(예비 매수자)가 본등기를 하는 순간 소유권 시점이 가등기 시점으로 소급돼 경매받은 이가 소유권을 날릴 수 있기에 경매시장에서 눈길도 주지 않는다.

전세사기꾼들은 무자본 갭투자 과정에서 들인 바지 집주인이 딴마음을 먹고 집 파는 걸 막으려고 가등기제도를 일종의 안전장치로 악용했다. 전세사기 피해 주택이 경매로 몰린 지난해부터 경매업계에선 이미 가등기 문제의 심각성이 널리 퍼져 있었다. 피해자 카페에도 비슷한 사례가 줄이었다. 기사화가 안 됐을 뿐이다.

정부 산하 전세사기지원센터, 관할 구청, 심지어 변호사 사무실에서도 답을 찾지 못한 피해자는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자에게 절절한 사연을 보냈다. 행여 기사라도 나면 정부가 관련 대책을 내줄 거라 믿었다고 했다. 본보 보도 뒤 정부는 "법무부 중심으로 대책 마련 검토 중"이라고 했지만, 3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 말이 없다.

해결의 실마리는 딴 데 있었다. 정부 대책을 기다리던 피해자는 가등기 때문에 '셀프 낙찰'도 받을 수 없다며 가해자 A씨를 엄벌해 달라는 탄원서를 냈다. 이를 본 A씨 국선 변호인 주선으로 피해자는 A씨의 예비 매수자 역할을 한 B씨와 가까스로 연락이 닿았다. B씨는 친구 아버지인 A씨에게 명의를 빌려줬다가 80억 원의 빚더미에 앉았다고 되레 호소했다. 피해자는 B씨의 선처를 부탁하는 탄원서를 법원에 내겠다고 설득했고, B씨는 이 말에 마음이 움직여 가등기를 말소해 줬다.

하루 전 메일 한 통이 왔다. 최근에 쓴 <'가등기 덫' 가해자 겨우 찾았지만…> 기사를 본 독자가, 본인도 같은 유형의 피해자라며 기사에 등장한 피해자 메일 주소를 알려 달라고 했다. 그가 어떤 심정인지 말하지 않아도 안다. 피해자들이 언제까지 기적에 기대야 하나. 지금이라도 정부가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 주길 바란다.

김동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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