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 체험] "구시대 유물이라고요?"... AI시대에 내가 먹 갈고 붓 잡는 이유

입력
2024.06.2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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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향 그윽한 주민센터 서예강좌

13일 오전 서울 중랑구 상봉2동주민센터에서 열린 서예 강좌에 수강생들이 한문 글쓰기 연습에 집중하고 있다. 신용주 인턴기자

13일 오전 서울 중랑구 상봉2동주민센터에서 열린 서예 강좌에 수강생들이 한문 글쓰기 연습에 집중하고 있다. 신용주 인턴기자


"글씨에도 뼈와 근육, 피와 살이 있습니다. 서예는 거짓말이 통하지 않아요."

13일 오전 서울 중랑구 상봉2동주민센터 강의실. 서예 강좌가 한창인 이곳에 15명 수강생이 차분한 표정으로 벼루에 먹을 갈고 있다. 먹 갈기는 서예의 준비 작업이기도 하지만, 서예를 할 때 필요한 평정심을 다잡는 '마음의 준비'이기도 하다. 먹물 색깔이 적당히 진해질 무렵,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준비된 수강생부터 차례로 붓을 들고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글자를 써 내려간다. 조용하고 진지한 분위기. 가끔 옆에서 조언하는 강사의 말소리 말고는 전혀 소리를 찾아보기 어려운 고요함이 이어졌다. 왜 서예가 정신수양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지를 바로 알 것 같다.

이날은 기자도 붓을 집어 들었다. 초등학생 때 학교 근처 수염이 난 할아버지 훈장선생님이 운영하는 서예학원에서 한글 붓글씨를 배운 이래 20여 년만이었다. 올바른 글씨를 쓰기 위해 비뚤어진 자세를 고쳐 잡는 것부터가 어려운 일이었다. 노트북으로 기사를 쓰는 것과 붓글씨를 쓰는 것은 달랐다 허리는 자꾸만 구부정해졌다.

13일 오전 서울 중랑구 상봉2동주민센터에서 열린 서예강좌에서 본보 기자가 붓글씨 쓰기 체험을 하고 있다. 신용주 인턴기자

13일 오전 서울 중랑구 상봉2동주민센터에서 열린 서예강좌에서 본보 기자가 붓글씨 쓰기 체험을 하고 있다. 신용주 인턴기자


"의자에 등을 기대지 말고, 곧추 세워야 해요. 왼손과 오른손은 가지런히 어깨 넓이를 유지하고, 팔꿈치와 옆구리는 떨어질수록 좋아요."

서예의 기본이라는 가로 세로 긋기부터 시작했다. 단순한 줄 긋기도 힘 조절과 앞뒤 반동이 중요하다. 검은색 먹물이 칠해지는 화선지에 온 신경을 집중했지만, 붓을 든 손끝이 덜덜 떨렸다. 조심스럽게 쓴 이름 석자는 삐뚤빼뚤해지기 일쑤. 25년 경력 서예강사 우당 이남규(63) 선생은 "서예는 아이가 부모님에게 거짓말을 하면 딱 보이는 것처럼, 요령을 피우면 그 형태가 글씨에 그대로 나타난다"며 "서법에 맞게 침착하게 정성 들여 쓰는 것이 서예의 기본"이라고 설명했다.

13일 오전 서울 중랑구 상봉2동주민센터에서 열린 서예강좌에서 본보 기자가 붓글씨 쓰기 체험을 하고 있다. 신용주 인턴기자

13일 오전 서울 중랑구 상봉2동주민센터에서 열린 서예강좌에서 본보 기자가 붓글씨 쓰기 체험을 하고 있다. 신용주 인턴기자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따르면, 서예의 정의는 '종이, 붓, 벼루, 먹으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 등을 그리는 조형 예술'로 분류된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비석, 묘지, 목판 등에 주로 사용되기도 했다. 한국 역사에서도 오랜 시간 동안 선비 정신을 지탱하는 뿌리로 여겼다. 그러나 최근 컴퓨터와 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기 사용이 일반화되면서, 서예는 구시대 유물로 취급되기도 한다. 최근 인사혁신처가 대통령 임명장을 작성하는 '필경사' 공무원 채용 공고를 내자, 일부 시민들은 "컴퓨터로 하면 되지 뭐 하러 필요 없는 직책을 뽑냐"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손글씨를 통해 '공무원의 자긍심과 사기를 높이고, 임명권자의 정성을 담는다'는 취지에도 별 공감대를 보이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냉소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서예는 여전히 전문 작가들을 넘어 일반 시민 사이에서 넓게 사랑받는 문화 활동이다. 국내 서예 인구는 약 500만 명, 각종 단체에 등록된 전문 작가도 5,0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여전히 사랑받는 예술이다.

서울 각 자치구에서 운영하는 서예강좌에는 신청자가 초과돼 대기자들이 줄잇고 있다고 한다. 중랑구 관계자는 "서예를 접한 옛 기억을 떠올려 다시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꽤 있다"며 "이제는 조금만 늦어도 대기해야 할 만큼 강좌 중에서도 인기가 높다"고 말했다.

13일 오전 서울 중랑구 상봉2동주민센터에서 열린 서예 강좌에서 수강생들이 한문 글쓰기 연습에 집중하고 있다. 신용주 인턴기자

13일 오전 서울 중랑구 상봉2동주민센터에서 열린 서예 강좌에서 수강생들이 한문 글쓰기 연습에 집중하고 있다. 신용주 인턴기자

이 번거롭고도 불편한 작업, 쉽게 실력이 늘지도 않는 이 일을 사람들은 왜 사랑하는 걸까. 은퇴 이후 여가생활, 취미 생활, 자녀 교육, 제사, 사회 활동, 공모전 출품까지. 거창하지는 않지만 저마다 서예를 배우는 목적은 분명했다. 3년 전부터 서예를 시작했다는 김종숙(67)씨는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다 보니 달리 취미 생활이랄 게 없었다"며 "붓을 들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진정되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이용경(70)씨는 종중의 제사에 쓸 축문을 직접 쓰고 싶다는 생각에 서예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컴퓨터 프린터로 축문이나 지방을 간편하게 뽑을 수도 있지만, 마음이 전해지지 않는 것 같아 직접 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며 "연습을 통해 달라지는 모습을 보면 뿌듯한 마음도 든다"고 웃어 보였다. 또 다른 수강생도 사군자를 그린 부채를 판매해 얻은 수익금으로 어려운 곳에 기부하고 있다고도 했다.

13일 오전 서울 중랑구 상봉2동주민센터에서 열린 서예 강좌에서 수강생들이 한문 글쓰기 연습에 집중하고 있다. 신용주 인턴기자

13일 오전 서울 중랑구 상봉2동주민센터에서 열린 서예 강좌에서 수강생들이 한문 글쓰기 연습에 집중하고 있다. 신용주 인턴기자


"서예를 통해 참다운 나를 만나면 좋겠어요. 함께 서예를 하는 사람들과 만나 서로를 응원을 주고 받으면서 삶의 활력도 찾을 수 있잖아요."

이날 주민센터 강좌에 모인 이들은, 일상 생활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고, 새로운 삶의 활력을 얻는데 서예가 역할을 할 수 있기 바란다고 입을 모았다. 강사 이남규 선생은 "처음 서예의 매력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신 스승께 지금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며 "우리 것이 어렵게만 느껴질 정도로 시대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는 것이 됐지만, 서예를 통해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김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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