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와 함께 찾아온...죽이고 납치하고 저주하는 ‘여자들’

입력
2024.06.25 10:30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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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주인공 삼은 여름 서점가 신간 소설들
강민영 ‘식물, 상점’·김서진 ‘달콤한 살인 계획’
김이삭 ‘천지신명은 여자의 말을 듣지 않지’

여성이 주인공인 호러·스릴러 소설인 강민영 작가의 ‘식물, 상점’(왼쪽 사진)과 김서진 작가의 ‘달콤한 살인 계획’ 표지. 한겨레출판사·나무옆의자 제공

여성이 주인공인 호러·스릴러 소설인 강민영 작가의 ‘식물, 상점’(왼쪽 사진)과 김서진 작가의 ‘달콤한 살인 계획’ 표지. 한겨레출판사·나무옆의자 제공

여자가 죽이고, 납치하고, 저주의 살(煞)을 날린다. 이른 더위가 시작된 여름 서점가에 발 빠르게 찾아온 호러·스릴러 소설들의 공통점이다. “헤어지자”고 말했다는 이유로 남성이 여성을 살해하는 교제 살인과 성범죄가 끊이지 않고 강력범죄의 가해자 95.6%가 남성(경찰청 범죄 통계·2022)인 현실과는 딴판이다.

각종 범죄에 복수하려는 여성들의 서사


“판을 조금 바꿔보고 싶었다. 여자들의 이름이 기억되고 여자들이 다치거나 죽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장편소설 ‘식물, 상점’을 쓴 강민영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강 작가의 소설엔 데이트 폭력, 불법 촬영·유포, 성범죄, 동물 학대, 스토킹, 가정폭력 등의 가해자를 처리하는 ‘유희’가 등장한다. 이름 그대로 식물을 파는 ‘식물, 상점’을 운영하는 유희는 자신과 손님들이 휘말린 각종 문제를 해결하려면 “끊임없이 여자를 괴롭히는 남자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여긴다. 강 작가는 “소설을 작업하는 동안 (죽어서) 사라지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보며 매 순간 좌절했고 공포를 느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쩌면 그래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모든 사건의 해결점을 쥐고 있는 유희가 공포를 제거해 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김서진 작가의 장편소설 ‘달콤한 살인 계획’에도 저수지에서 죽은 소녀 ‘소명’을 대신해 복수하려는 ‘홍진’이 등장한다. 남편의 폭력으로 아이를 잃고 자신도 칼에 찔려 겨우 살아남은 이후 정신분열증을 갖게 된 홍진은 죽은 소명의 환시를 보며 살인범을 죽이려 고군분투하나 어설프다. “여자들은 자칫하면 속아서”라고 깔보는 말 그대로 시가보다 수백만 원을 더 주고 산 중고차로 교통사고를 낼 계획을 짜거나 케이크로 독살을 노리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홍진이 집요한 살인 계획을 짠 건 소명 때문이 아니었다. 재판장에서 남편을 선처해달라고 호소해야 했던, 나약하고 무기력했던 과거의 자신이라는 또 다른 피해자에게서 비롯됐음을 소설은 말한다.

"여자들의 말은 아무도 들어주지 않지"

천지신명은 여자의 말을 듣지 않지·김이삭 지음·래빗홀 발행·304쪽·1만6,800원

천지신명은 여자의 말을 듣지 않지·김이삭 지음·래빗홀 발행·304쪽·1만6,800원

여성 혐오를 호러의 이름으로 되짚어보려는 시도도 있다. 모두 여성이 주인공인 5편의 단편소설이 실린 김이삭 작가의 단편소설집 ‘천지신명은 여자의 말을 듣지 않지’다. 소설의 제목 그대로 주인공의 목소리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남편이 줄줄이 죽었다는 이유로 마을에서 쫓겨난 ‘옹녀’(‘낭인전’)와 가문의 액운을 몰아서 받는 별당 여아(‘풀각시’)부터 현대 스토킹 피해자(‘성주단지’)까지.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받은 이들은 결국 귀신, 괴물 등 “논리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 괴이한 힘을 지닌” 존재들에게 닿아 반격한다.

출판사 래빗홀은 ‘천지신명은 여자의 말을 듣지 않지’에 대해 “작품 속 주인공들은 자신을 피해자 혹은 타자로 규정하는 이들에게 반격하며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간다”면서 “여성·소수자 서사와 호러의 공존 가능성을 탐색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전혼잎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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